빵굽는 타자기
작가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부업으로 벌고, 남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글을 쓴다. 명색이 작가인 자가 대학에 숨어서 고만고만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너무 평온하게 지내는것은 옳지 않다는 게 내 신조였다.
상점에 들어가는 것은 변환적인 마력을 금전등록기에 불어넣는 연금술적 과정에 참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표현할 수 없는 욕망, 추상적인 욕구, 정체불명의 갈망이 일단 금전등록기를 통화하면, 그 모든 것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형의 물체를 바뀌어 나타났다.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돈을 절대로 돈 그 자체만이 아니다. 돈을 언제나 돈 이외의 것이고 돈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돈을 언제나 최종결정권을 쥐고 있다. 이 세상은 돈이 말한다 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돈의 주장에 따르면, 인생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바깥세상은 정글 아닌가? 월 스트리트 한복판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저 드레퓌스 사자를 보라 그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가 있을까? 먹느냐? 먹히느냐? 둘 중 하나다.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식욕이 동하지 않으면, 늦기 전에 빨리 달아나라
한계를 넘으면 지푸라기 하나만 더 얹어도 낙타 등뼈가 부러진다. 그 마지막 싸움은 내 마음에 상징적인 지푸라기로 남아있다.
나는 중랑이 없는 핏발선 눈을 가진 생명이다. 내면에서는 절망적인 격동이 파도처럼 굽이치고, 견해나 태도가 갑자기 정반대인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면 나무토막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예의 범절을 갖고 있지만 기쁨을 함께 나눌 상대로는 별로 적당치 않다.
두 사람은 평생친구였고, 한 꼬리 속에 든 두 개의 완두콩 같았다. 케이시와 테지는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걸어 나온 듯이 보이는 전형적인 떠돌 이었지만, 낙후된 시골이나 세상의 똥 구덩이 같은 곳에 잠깐씩 들어가 보면 어김없이 재미난 것을 발견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낸 2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고, 인생을 바꾸어 놓는 새로운 피가 수혈되어 혈액을 성분까지 달랐다.
나는 벌컥벌컥 술잔을 비우듯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어냈고 책의 나라와 대륙을 모조리 섭렵했으며 아무리 읽어도 는 책에 허기져 있었다. 내가 누군가로 변신하여, 잠시 다른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는, 나 자신을 철저히 개조했다고 상상하려 했다. 그 대단한 말의 마라톤, 이성의 미 개척지로 들어가는 강제행진, 그자 자신의 음모와 은밀한 계획과 비밀통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보낸 그 숱한 시간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자기성찰과 자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은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서툰 솜씨로 망쳐버린 찌개를 어떻게든 먹을만하게 만들려고 주물러 걸리다가는 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행운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베트남, 시집들을 ‘옆으로 밀쳐놓고, 이제는 가망이 없다.
그 고생을 하고도 나는 연희적 내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부질없고 어리석은 에도다.
인생의 특정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러면 살아있는 사람 안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과도 많은 날들을 함께 보내는 것을 알았다.
돈벌이를 위해 번역을 학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가? 그 몇 년 동안은 책상 앞을, 떠난 순간이 거의 없었다. 거의 온종일 낱말을 적으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이 생활고와 싸우면서 그냥 저냥 시간을 파먹고 있던 그 풋내기 시절, <누군가>가 나를 후원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그 과도의 경계선 이었다. 청년기와 성인기 사이의 서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나는 이제 영원히 벽 너머에 있었다.
이 대화는 내 무의식 어딘가에 박혀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를 빼냈다. 기억의 작은 구멍 하나를 틀어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 구멍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거기에서 거의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냈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황홀한 글 감옥] – 조정래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 무엇 인기 답을 찾으려고 수천년 동안 방황했던 것이 철학자들 입니다.
‘소설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 탐구다 ‘ 그 인식에 파편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역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이야기 이되,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만 간추려 엮어놓은 기록이다.’
‘작가는 역사를 몰라서는 작품을 쓸 수 없지만, 역사가는 문학을 몰라도 역사연구를 할 수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고요한 동강, 레미제라블…… 모든 작가는 자기의 작품이 시공을 초월해서 영원히 남겨지기를 소망하여 책상에 다가 앉고, 펜을 잡아 외로운 고통과 싸워 나갑니다.
그 욕망과 결의 앞에서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 소리 없는 침묵의 싸움을 통해서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은 태어나고, 그 문장들의 수없이 모여서 한편의 소설이 됩니다.
그들이 세계를 향해 외치는 말,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 영국은 4억 인간의 존엄성보다 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값을 더 높게 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어떻습니까? 이 보다 더 큰 영예, 이보다 더 큰 칭송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처람 되고 싶다.’ 그 감추어진 목표가 바로 문학사가들의 내린 정의와 맞 통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에 이르자면 철저하게 ‘그 시대의 산소’노릇을 해낼 각오를 해야 하고, 치열하게 산소역할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문학이 가장하고 싶은 일이고, 문학은 해야만 가장 행복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주저 말고 그 길을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그 찬란한 위상의 주인공이 될지는 모르니 얼마나 벅찹니까?
문자의 기록이야 말로 인간이 발휘한 가장 위대한 힘으로 얼마든지 칭송하고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이야 말로 문자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고 태어난 생명임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말로 지은 원한은 백 년을 가고, 그로 지은 원한은 만년을 간다. 이건 당나라 시절부터 전해져 온 말입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글로 원한을 짖지 말라는 것인가요? 그건 절반밖에 해독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 찾아내야 할 뜻은 ‘글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니 일부, 독자도 언제나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가끔은 일부 독자라도 만족시키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레닌 옆에서 막심고리 키가 그랬듯이 수많은 작가는 역사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펜을 든 혁명가의 역할을 해내며 인간의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그 역사적 역할, 그것이 곧 ‘그 시대의 산소’노릇입니다.
소설가의 산소역할의 산소는 무엇일까요? 그건 ‘진실’인이다, 사회적 진실, 역사적 진실, 인간적 진실을 옹호하고 육성하는 일, 그것이 바로 산소 역할입니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써도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모든 비인간적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끝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말해서는 안된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할은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뭐라고 했던가요? 소설 쓰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은 그 누구나 자신의 작품도 그 어떤 정치력이나 경제력도 능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설가의 존재이유고 작가가 스스로 ‘글 감옥’에 갇히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건 다름아니라 ‘삼다’ 방법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저 중국시인 구양수의 구태의연한 처방 법 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유일한 방법이고 또한 첩경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라! 이 권유와 충고는 백 번, 천 번, 만 번을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 그 세가지 일깨움을 당신의 영혼에 알로 새기고, 가슴 한복판에 화인처럼 찍으십시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날마다 바보처럼, 미련퉁이처럼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러면 문학의 여신은 뜻밖에도 빨리 여러분을 찾아 올 것입니다.
인간의’자기표현력’은 본능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 옛날부터 무용담을 중심으로 구전문학이 생겨난 거겠지요. 그리고 일기쓰기가 보편화된 것도 그 욕구의 실천입니다.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의 재능과 개성에 따라 기발하고 특이하게 단어들을 조립하고 배합해 나갑니다. 다독은 글을 잘 쓰게 해주는 고민해결사이고 만병통치 신약입니다.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시작하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온 세상이 잠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보장을 하는 것을 아무 잘못이 아니고 더구나 죄 될 리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어 라고 누누이 말한 것도 ‘창조적 모방’을 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모방하되 끝내는 자기의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해 내야만 예술가로 입신할 수 있으니까
모방을 하되, ‘ 창조적 반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내지 않는 자기만의 특색과 개성을 갖춘 문장 그것을 문체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적 모방’이 바로 ‘자기 만의 문체 확립’입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 질 때까지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그책속에는 천재들이 ‘최선을 다한 촉감’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집념과 열정과 끈기와 성실이 그것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5백 번의 책을 읽지 않고는 소설을 쓰려고 펜을 들지 마라” 그 5백 번의 책이면 세계문학전집 1백 권, 한국문학전집 1백 권, 중. 단편 소설집 1백 권, 시집1백 권, 기타 역사, 사회학 서적 1백 권입니다.
그것도 한차례씩만 읽고 말 것이 아니라 5년을 주기로 되풀이 해서 읽으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기본체력의 확보 없이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 할 수 없습니다. 다리를 깊게 구부린 개구리만이 높이 뛸 수 있으며, 날기 연습을 많이 한 새만이 수만 리 땅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글쓰기 작업은 오로지 혼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정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이 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 철칙입니다.
그걸 굳이 설명하라 하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 말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각자가 하고 싶은 마음은 이런 식으로 절로 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실패가 없고 후회가 없고 ‘그 생애는 행복합니다.
단, 사람에 따라서 그 발견의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한가지 일에는 마음 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열정은 능력이다’ 가자 뛰어난 능력은 지치지 않는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선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닌데, 자기 스스로 그 분야의 예술에 끌리고, 하고 싶고, 하면 즐겁습니까? 하면 즐겁다 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 분야의 예술에 재능을 타고난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의 노력은 ‘재능’을 능가하는 힘이며, 인간에게 신수를 가져다 주는 마력을 발휘하며, 유치하게 금언을 흉내 내서 말하자면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저는 저의 재능보다 노력을 더 믿었습니다.”
‘무엇은’ 써야 할 ‘내용’이고 ‘어떻게’는 쓰는 ‘형식’일 것입니다. 내용 앞에 형식에 나설 수는 없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저는 남달리 이 척박한 역사의 땀에 태어남과 문학이라는 것의 특이한 의미와, 글로써의 남겨져야 할 가치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소설은 연예이야기나 쓰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떤것을 써야 하는 존엄한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던 것입니다.
젊은 시간에 많이 고민하십시오. 고민 없는 젊음은 젊음이 아니고, 젊은 고민은 인생의 문을 열어줍니다.
인간과 인간세상의 본질은 잃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혼자 일수 없고 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히고 설킴이 사회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들을 협상화 하는 소설입니다.
당신이 감동 깊은 작품을 쓰고, 오래도록 행복한 작가 생활을 누리고 싶다면 기필코 3인칭 소설을 습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기성작가라면 어서 저의 충고를 받아들여 1인칭으로 쓰는 악습을 고치기에 나서십시오.
또 아름다운 지적 자산을 자식에게 부모를 재인식 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며, 수천 마디 말보다 강한 삶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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